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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스포츠 감동이야기

2020.08.25 11:01:53


 

짐 애보트(Jim Abbott)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야구선수다.
짐 애보트(Jim Abbott)는 뉴욕 양키스 선수 시절 1993년 9월 4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뉴욕 양키스 역사상 메이저리그 7번째 노히트 노런이었다.

왼손 투수인 짐 애보트(Jim Abbott)는 오른손이 없다. 1967년생인 짐 애보트(Jim Abbott)는  오른손이 손목까지만 자라는 조막손이었다. 짐 애보트(Jim Abbott)는  자신의 장애를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고 결고 좌절하지 않았다. 짐 애보트(Jim Abbott)는 고등학교 시절 야구팀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고, 미식 축구에서는 쿼터백을 맡는 등 스포츠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진출하지 못한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미국 야구 대표팀으로 참가하여 결승전에서 호투하며 미국팀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88년 서울 올림픽에서의 활약으로 짐 애보트(Jim Abbott)는  LA에인절스에 입단 제의를 받았다. 입단 당시 짐 애보트(Jim Abbott)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16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바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가 됐고 데뷔 첫 해 12승을 거두며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로 성장했으며 1991년에는 243이닝 18승을 거두었다.

왼손 투수였던 짐 애보트(Jim Abbott)는 오른 팔목에 글러브를 걸친 채 투구를 한 뒤 수비할 때는 번개같이 왼손에 글러브를 바꿔끼고 공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글러브를 오른 손목에 걸치면서 왼손으로 공을 던졌다. 이 동작을 메이저리그에서는 <애보트 스위치>로 부른다. 짐 애보트(Jim Abbott)는 오른손으로 배트를 쥘 수 없지만 21타수 2안타라는 안타 기록도 가지고 있으며 2안타중 1안타는 메이저리그 최고 마무리 투수인 마리아노 리베라에게서 뽑아낸 것이다.

짐 애보트(Jim Abbott),
지금은 메이저리그를 은퇴했지만 그는 아직도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꿈과 영감을 던져주고 있다.

 

 

2009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특별한 선수가 출전을 했다.
그 선수는 두 다리가 없어 “농구공 소녀”라고 불리는 첸 홍얀, 첸 홍얀이 농구공 소녀로 불리게 된 이유는 발 대신 농구공을 발 삼아 걸어다녔기 때문이다. 첸 홍얀의 할아버지가 만들어줬다는 농구공 발과 나무 손잡이에 의지해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중국의 시골마을 원난성 루량현에서 자랐다. 2000년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어른들을 돕기 위해 밭에 가던 네 살 꼬마 첸 홍얀은 화물차에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그 사고로 첸 홍얀은 골반 밑으로 양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 난 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런 장애에도 가정형편이 너무나 가난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못했다. 몸을 바닥에 끌고 다니면서 자주 다치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가 농구공 발과 나무 손잡이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첸 홍얀은 양 팔과 농구공 발로 걷게 되었고 그 뒤로 그녀는 농구공 소녀가 되었다.

홍얀의 안타까운 사연은 2005년 중국 인민일보를 통해 농구공 소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운명적으로 중국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팀 장훙구 코치를 만나게 된다. 부족한 가정 형편에 공부는커녕 농구공 발에 의지해 하루를 버텨내던 홍얀은 꿈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물에 떠 있을 방법이 없는 것 같았고 항상 숨이 막히는 기분이에요."

홍얀에게 수영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종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다리 대신 팔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되는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며 2008년 윈난성 장애인 체육대회 금메달 3개, 2009년 18세 이하 장애인 선수권 대회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 2010년 장애인 수영선수권대회 은메달 3개 등 타협하지 않던 자신과의 싸움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잘 이겨내던 첸 홍얀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그녀는 수영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세상을 향한 비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15년 9월 윈난성 장애인체육대회 여자 평형 100m 결승전에서 우승하며 '화려한 복귀'를 선언하며 그녀의 힘찬 날갯짓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보스턴에서는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 애국자의 날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있다.
바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대회는 1947년 서윤복 선수가 당시 세계 최고기록으로 우승을 한 것에 이어 2001년 이봉주 선수가 우승을 하기도 한 인연이 깊은 대회이다.
미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열린 2016 보스턴 마라톤 대회는 바로 3년 전 2013 보스턴 마라톤에서 발생한 불의의 폭탄테러로 인해 다리를 잃었던 패트릭 다운즈(32)가 인공 보철다리로 완주에 성공하여 이목을 끌었다. 같은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31명의 사람들이 이 대회에 참가했으며 당시 테러로 부부가 모두 장애인이 된 패트릭 도운스 부부가 6시간만에, 여성 프로 댄서였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아드리란 해이슬릿 데이비스가 10시간 만인 오후 7시 30분쯤에 결승선에 도착했다. 

보스턴에서는 이번 마라톤을 모두가 함께 극복해나가는 희망의 행사로 진행하여 더욱 눈길을 끌었으며 We are Boston Strong 이란 슬로건으로 슬픔을 함께 하고 희망을 전하는 마라톤 대회를 만들어가며 슬픔을 더 큰 행복으로 극복하고 Boston Spirit을 전 세계에 알린 감동의 마라톤 대회였다. 사건의 주범이었던 테러범에게는 강력한 판결을 내렸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마라톤을 선택한 보스턴 시민들에게는 3년전 울었던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었습니다.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스토리는 선수들이 팬들에게 전달하는 멋진 플레이와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 정상에 오르는 모습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극복했기에 이겨낼 수 있었던 시간, 모두가 하나가 되어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약해지지 않고 강해질 수 있도록 서로를 부축해주고 이끌어주는 모습이 스포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감동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뛰어난 실력으로 국내외 언론에 주목을 받고 있는 테니스 선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뉴욕타임즈에서 대서특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선수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귀가 들리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라켓을 잡은 것은 7살 때입니다. 아버지 이상진 씨는 아들에게 대화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골프, 사격, 양궁 등의 운동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덕희 선수는 테니스를 선택합니다. 어느 날 자신의 사촌이 경기하는 것을 보고 그 매력에 끌려 테니스를 시작하게 됩니다.

테니스를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가 프로레벨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로레벨로 갔을 경우 공의 소리를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세계 일류 선수들은 공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이 라켓에 맞는 소리를 듣고 공의 궤적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들리지 않는 것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들리지 않는 대신 남들보다 더 경기에 집중했고 뛰어난 동체시력으로 공의 구질과 방향등을 예측해 반응했죠.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이덕희 선수처럼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선수가 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낸 경우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1998년생, 당시 나이 18살에 불과합니다. 이덕희 선수는 11월 ATP 싱글랭킹기준 144위에 올라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가 프로무대에서 100위안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얘기합니다. 

“어느 스포츠든 최고 수준의 선수가 되는 데는 남다른 재능과 노력 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만 할 겁니다. 결국, 확률 싸움이라면 테니스의 경우 세계 150위권 안에 드는 훌륭한 선수들 가운데 (청각장애가 없는) 비장애인이 청각장애인보다 더 많은 것이 당연합니다. 전체 인구 가운데서도 청각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소수니까요. 이덕희 선수는 재능과 인격, 영민함, 성실함, 그에게 주어졌던 여러 기회와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준 이들 덕분에 이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가 테니스 선수로 지금껏 성장하고 성공하는 데 듣지 못한다는 건 별다른 장애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뉴욕타임스)

청각장애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고 자신을 끌어내릴 수 없다고 말하는 이덕희 선수,
그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초원이 가슴이 뛰어요, 초원이 가슴이 콩당콩당 뛰어요."
코치가 무심하게 던진 삼십 바퀴, 백 바퀴를 뛰라는 지시에도 기꺼이 운동장 트랙을 돌고 있는 초원이의 모습. 초원이가 숨을 몰아쉬며 코치의 손을 잡아 자신의 펄떡펄떡 뛰는 가슴에 갖다 대며 하는 말이다. 그 울림이 더 큰 감동이 되어 무관심했던 코치의 가슴으로 전달된다. 

우리는 영화 ‘말아톤’을 통해 장애인체육의 환경을 엿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 더 이상 지도받을 수 없는 현실에 초원이 엄마가 직접 지도하지만 엄마의 지도력은 한계가 있고, 전문가를 찾아 가서 초원이를 부탁하지만 초면의 지도자는 ‘얼마 줄거요?’라는 말로 대신하고 외면해버린다. 이러한 모습은 초원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부딪히는 체육현장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건강’이라는 체육활동의 목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 장애인에게 있어의 건강은 비장애인보다도 더욱 필수적이고 나아가 그들의 생명력이 될 수 있다. 체육활동을 통한 그들의 건강향상은 의료비용 절감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가지며, 비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생활체육은 더불어 사는 사회 환경을 만드는 초석이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장애인들이 체육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다행스러운 것은 2005년 말 장애인체육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보건복지부에서 문화관광부로 이관되었고, 문화관광부 체육국 장애인체육팀에서 장애인체육 정책을 시행하면서 늦게나마 장애인체육의 당면한 과제들을 하나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장애인체육을 학교체육, 생활체육, 전문체육 등으로 분류를 하면서도 전문체육 위주로 진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장애인들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장애인 누구나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 환경이다. 따라서 장애인체육팀에서는 생활체육 활성화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어 추진하고 있다. 그 동안 장애인들의 생활체육이 활성화되지 못한 부분도 따지고 보면 가장 기본적 전제 조건인 체육지도자, 체육시설, 체육프로그램의 부재 등 장애인들이 생활체육을 즐기는데 필요한 환경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아직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으로 볼 때 장애인생활체육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시기상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의식수준이 기대치 만큼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정부 주도적인 변화를 통해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장애인생활체육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서울 주택도시공사(SH공사) 실업팀으로 본격적인 장애인조정 선수의 길로!
"군 생활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임했듯이 이제는 운동선수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북한의 목함지뢰에 두 다리를 잃은 뒤 장애인 조정선수로 제 2의 인생을 사는 전 육군중사 하재헌선수이다. 하재헌(26)은 2015년 8월 4일 육군 제1사단 수색대대 소속으로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중 북한의 목함지뢰에 두 다리를 잃었다. 재활 차원에서 장애인조정에 입문했다가 재능을 발견, 본격적인 선수의 길로 나섰다. 하재헌은 지난해(2018년) 전국장애인조정대회 우승 등을 차지하면서 패럴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지난 2018년 1월 전역했다.

장애인체육은 종목마다 장애 정도와 유형에 따른 등급을 둬 등급별로 경쟁하고 순위를 매긴다. 하재헌 선수의 출전 등급은  PR1 등급이다. “팔과 어깨 등 상체만 쓰는 등급”이며 경기할 때는 의족 없이 출전한다. 또한 하재헌은 1인승 배를 타는 '싱글스컬'이 주종목이다. 임 감독은 "한국 선수가 패럴림픽에서 5위까지 기록한 바 있다"며 "하재헌 선수가 조금만 더 경력을 쌓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장애를 딛고 장애인 체육에 뛰어든 하재헌은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선 것은 전 국민들과 장애인 선수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보디빌딩계의 새로운 역사 스티브 알렉시
스티브 알렉시 그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거주하는 74년생의 남성입니다.
그는 선천성 뇌성마비를 앓았으며 의사는 그에게 “뇌성마비로 당신은 평생 걷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진단을 내렸지만 그는 러블렛이라는 퍼스널 트레이너와 함께 보디빌딩을 시작하게 되고 뇌성마비의 특성인 신경 근육계의 조절 이상에도 불구하고 보디빌더의 몸을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그의 대회 출전 영상이 Youtube에 게시되며 전세계 많은 장애인들은 ‘도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게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는 2011년부터 최근까지 총 5개 이상의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였으며, 6개 이상의 트로피를 거머쥐게 됩니다. “포즈를 취할때마다 온몸이 떨리고 자세가 흐트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소리에 또다시 힘을 내죠. 어렸을 적 나에게 뇌성마비 진단을 내린 의사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뇌성마비라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보디빌딩. 그는 비장애인도 어려운 보디빌딩이라는 종목을 시작하였고 “나는 장애가 있지만, 무능력하지 않다.”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며 보디빌더의 몸을 만들었습니다.

“평생 걷지 못 할 것”, “장애인은 못할 것”이라 말했던 비장애인과 의사들에게 알렉시는 “절망스러운 상황은 없습니다. 절망스러운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라고 말 합니다. 그는 이 절망스런 사람을 꾸짖으며 “장애는 능력이다. 장애는 아름답다.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라고 말 했습니다.




 

우리는 썰매를 탄다.
선수와 지원이 부족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팀이 수백 개의 팀과 기업이 활발한 미국, 캐나다 등과 대등하게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파라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6년 강원도청 첫 실업팀 창단 후 3년 만에 동계장애인올림픽 본선진출은 누구도 예상 못한 기적이었다. 

영화<우리는 썰매를 탄다>는 실제 경기를 촬영하며 선수들의 열악한 훈련과정에서부터 노르웨이 세계선수권대회까지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담았다. 이 영화는 연출한 김경만 감독은 “영화의 재미를 위해 스토리라인을 만들고 장면을 연출했으면 빨리 찍을 수 있겠지만, 굳이 향신료와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아도 그들의 삶 자체가 진국이었기에 나레이션과 자막까지 과감히 생략했다.”고 말한다. 경기자체보다 선수들의 행복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최대한 절제하며 촬영하였다고 합니다. 

‘행복의 의미를 질문하는 작품’

대한민국 파라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은 말한다.
“다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정말로!” “하늘나라 가서 말 할 수 있어요. 정말 행복했었다고. 당신들은 한 가지 인생만 살아봤지만 난 두 가지 인생을 살았다고!” 그들은 다양한 사고나 질병으로 다리를 잃었지만 함께 운동하며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자긍심으로 웃음 짓는다. 대한민국 파라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수들은 가장 행복한 순간을 ‘사고’ 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친 일상과 두려움 속에서 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들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 
패럴림픽에서 감동을 선사한 한민수는 오히려 응원을 보내준 이들에게 감동 받고 있다. 그의 모교인 토평초등학교에서는 한민수 앞으로 무려 500여 통의 편지가 보냈다. 아이들은 “아저씨, 다리도 없는데 넘어졌다 일어나는 게 왜 이렇게 빨라요. 멋있어요”라면서 “줄 잡고 성화봉을 옮길 때 감동했어요”, “저도 이다음에 커서 아이스하키 선수가 될 거예요”라는 편지가 쏟아졌다. SNS를 통해 응원 메시지와 댓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민수는 시간이 걸려도 이들에게 모두 감사의 인사를 전할 계획이다. “SNS 댓글을 일일이 다는 것도 시간이 걸리지만 감사한 마음에 하고 있어요. 토평초등학교 후배들에게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 답장을 보낼 생각입니다.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기쁜 일이잖아요.” 한민수는 아내와 두 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제가 벌어준 걸로도 아내가 알뜰하게 큰 빚 없이 잘 살아왔어요. 너무 고마운 일입니다. 집안이 편하고 마음이 편해야 운동도 할 수 있잖아요. 아내의 희생이 없었으면 제가 마음 편하게 운동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한 편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이 희망을 품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장애를 안았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길 꺼려하는 이들에게 꼭 이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저는 늘 자신감 있게 살았어요. 20살 때부터 운동에 집중하고 몸에 힘이 생기니 어디 가서도 자신감이 넘쳤죠. 꼭 상대와 싸우자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면 내 의견도 당당히 이야기했어요. 운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숨지 말고 세상으로 나와 당당해 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소아마비 장애만 있어도 집안에 장애인이 있는 게 창피하다고 집밖에도 못 나가게 했어요. 하지만 스스로가 강해지고 세상과 부딪혀야 합니다.


그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요즘에는 사고로 인해 중도 장애를 얻는 이들이 많습니다. 팔다리 다치는 데 나이도 없고 순서도 없어요. 어느 한 순간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런 중도 장애인은 세상이 자꾸 품으려고 해요. ‘다쳤는데 뭘 또 하려고 해. 내가 보살필게.’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말이 결국 그 사람을 망치는 겁니다. 운동을 통해 자신감도 얻고 사회성을 길러야죠. 몸은 불편해도 생각하는 거나 먹고 싶은 건 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왜 장애를 가졌다고 위축되고 살아가야 하나요. 장애인을 보호한답시고 세상과 단절시키면 결국 이 사람들은 사회성을 잃고 자신감도 잃어요.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런 정서가 깔려야 많은 장애인이 ‘어? 나보다 몸이 더 불편한 사람도 저렇게 사네. 나도 세상으로 나갈래’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같이 운동하는 우리 선수들 중에도 세상과 등지고 있다가 10년 만에 나온 경우도 있어요. 어느 순간 닥친 이 장애로 인생을 포기하려 했다가 세상에 나온 이들입니다. 이런 사례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이런 분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제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민수는 패럴림픽 기간 동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전해졌으면 한다. 다리 한 쪽이 없어도 밧줄에 의지해 정상에 선 한민수처럼 많은 이들이 시련을 딛고 일어섰으면 한다. 한민수는 긴 시간 인터뷰를 마친 뒤 웃으며 말했다. “아마 이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이렇게 우는 것도 사치였을 겁니다. 울보라고 놀리지 말아주세요”




 


전민재 선수는 5살 원인 모를 뇌염으로 뇌성마비 1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말을 못하고 손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던 그녀는 점점 사람을 피하기 사작하였고 18살이 되던 해 집 밖에 나가는 걸 꺼리기 시작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전민재 선수가 사는 곳에는 그녀를 받아 줄 학교가 없었을뿐더러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그녀가 사춘기 시절 부모님께 억장이 무너지는 편지 한 장을 썼는데 손을 가누지 못해 발로 삐뚤빼뚤 적은 종이에는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녀가 19살이 되던 해 마을 목사님의 도움으로 인근 도시 특수학교(초등)에  처음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점점 달라졌습니다. 열아홉 늦은 나이로 초등학생이 된 전민재 선수는 덕분에 원하던 공부를 하며 점점 꿈을 찾아갑니다. 전민재 선수가 중고교 과정의 재활학교에 진학했을 때 달리기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에게 학교 체육선생님께서 육상을 처음 권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육상선수가 된 전민재 선수는 이듬해부터 국내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더니 자연스레 태극마크까지 달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국제경기인 올림픽에서의 메달을 꿈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새 국내에는 그녀의 적수가 없을만큼 성장했지만 149cm 작은 키로 국제대회에서는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턱없이 작고 불리한 신체조건이었고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인 2008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았고 당시 소속팀이 없어 그녀가 사는 시골 고추밭과 논두렁에서 매일같이 달려가며 노력했습니다.

노력은 전민재 선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2012년 런던 장애인올림픽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육상200m에서 은메달을 거머쥐게 됩니다.
2012년 런던 장애인 올림픽대회(육상 여자 200m T36 은메달)
2013년 국제패럴림픽 위원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육상 여자 200m T36 금메달)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육상 여자 100/200m T36 금메달)
2016년 리우 장애인올림픽대회(육상 여자 200m T36 은메달)
전민재 선수처럼 또 다른 목표를 세우거나 새로운 꿈을 꾸기에 절대 늦은 나이란 없습니다. 
여러분도 도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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